[오드리 햅번] 천사로 살다간 오드리 햅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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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드리 햅번] 천사로 살다간 오드리 햅번|작성자 매
오드리 헵번 (Audrey Kathleen Ruston) 영화배우
출생-사망 1929년 5월 4일 (벨기에) - 1993년 1월 20일
신체 170cm, 49kg
가족 아들 션 페러
데뷔 1948년 영화 'Nederlands in lessen'
수상 1993년 제55회 아카데미 시상식 진허숄트박애상
경력사항 1992 유니세프 친선 대사
수상내역 1993 제55회 아카데미 시상식 진허숄트박애상
1990 제47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평생공로상
1964 제18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1959 제13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1959 제7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1959 제25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 여우주연상
1954 제26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1953 제7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1953 제19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 여우주연상
"넌 만약 네가 연예계로 데뷔를 하려고 하는데 이름이 신혜교 이라면 송혜교에게 주눅 들지 않고
신혜교 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쓸수 있겟니?"
오래전 할리우드에서 있었던 이야기야.
한 신인 여배우가 영화 데뷔를 앞두고 있었는데, 영화사 사장이 불러서 이렇게 말했어.
"캐서린 햅번 때문에 안되겠어. 자네도 봤지? 그녀의 그 강렬하고 섬뜩하기까지 한 팜므파탈연기 말이야. 덕분에 지금 온 세상이 햅번 신드롬으로 몸살을 앓을 지경이야. 오드리햅번, 참 좋은 이름이지만 캐서린 햅번과 부딪히면 승산이 없어. 방법은 하나뿐이야.
자네 이름을 바꿔야 겟어."
그러자 오드리 햅번이 말했어.
"나는 나,오드리 햅번이예요. 난 내 이름 그대로 세상에 나갈거예요.
그리고 크게 사랑받을 거예요. 다른 선택은 없어요!"
출처 - 이지성 '스무살,절대지지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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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햅번
1929년 5월 4일
그녀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 제임스 A. 헵번 레스톤과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 남작가문 출신의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4살때 영국으로 건너갔고
6살때 런던 교외의 기숙 학교에 입학한다.
8살이 되던해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얼마 지나지않아 그녀의 부모는 이혼을 하게된다.
이후, 그녀는 어머니의 고국 네덜란드에서 지내게된다.
나치점령 하에서
그녀는 우울증과 영양 실조에 시달리며
전쟁의 공포와 굶주림 등 온갖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유니세프의 전신인 국제 구호 기금이었고 이때의 기억이
훗날 그녀가 유니세프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 이유가 되었다.
그녀는 발레리나가 되기로 결심한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좋아했던 오드리 헵번은 발레리나가 되길 원했지만
170cm에 달하는 큰 키 때문에 발레리나의 꿈은 이룰 수 없었고
대신 발레로 다져진 우아한 몸매와 귀엽고 발랄한 외모 때문에
연극과 영화에 단역배우로 출연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녀 나이 19살
1950년 마리오 덴비 감독의 눈에 띄어 <낙원의 웃음>에 단역으로
데뷔하게 된다.
<젊은 아내의 이야기>, <첫사랑> 등 6개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했으나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꼴레트의 눈에 띄어 그녀의 작품
'키키'의 브로드웨이 무대에 주연으로 발탁된다.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이작품을 본 명장 윌리암 와일러가
그녀를 자신의 작품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게된다.
그 작품이 바로
오드리 햅번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로마의 휴일'이다.
1954년 2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Academy Awards)
여우주연상(Best Performance by an Actress in a Leading Role
철없고 순수한 공주로 나왔던 오드리 햅번은
'로마의 휴일'을 통해 첫 오스카상을 손에 쥐게된다.
여리여리한 몸매,커다란 눈망울,환한 미소를 가진 그녀는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그후 ‘사브리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등
출연하는 작품마다 승승장구 하여
그녀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 발돋움하게 된다.
<오드리햅번이 출연한 작품들>
1. 영혼은 그대곁에 (Always, 1989)
2. 뉴욕의 연인들 ( The All Laughed, 1981)
3, 혈선 (Blood Line, 1979)
4, 로빈과 마리안 (Robin And Marian, 1976)
5, 어두워질 때까지 (Wait until dart, 1967)
6, 뜨거운 포옹 ( Paris - When It Sizzles 1964)
7,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 1964)
8, 티파니에서 아침을 (Breakfast at Tiffany's. 1961)
9, 샤레이드 (Charade, 1963)
10, 파계 (The Nun's Story, 1959)
11, 화니 페이스 (Funny Face, 1957)
12, 하오의 연정 (Love in the Afternoon, 1957)
13,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 1956)
14, 사브리나 (Sabrina, 1954)
15,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 1953)
그녀의 연기인생은 순조로웠다.
그녀의 헤어스타일, 그녀의 패션은 전 세계의 여심을 사로잡았고
‘ 디자이너 지방시와의 만남으로 ‘오드리 헵번 스타일’ 이라는 자신만의 패션 브랜드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어릴 적 기억때문이지 배우로서의 명성보다는
한 남자의 아내로 헌신하는 삶을 꿈꾸었고
‘로마의 휴일’로 스타덤에 오른 직후 영화배우 멜 퍼러와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게된다.
결혼 당시 오드리 햅번은 25세였고
배우자 멜퍼러는 12살연상에
그녀와 세번째 결혼이었다.
상대배우 멜 퍼러(Mel Ferrer)와 사랑에 빠진 오드리 헵번
멜 퍼러와의 사이에 아들 숀
안타깝게도 그녀의 결혼생활은
그녀의 연기인생만큼 순조롭지 못했고
그들의 결혼생활은 14년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팬이자 정신과 주치의인
9살 연하 안드레아 도티와 또 한번의 결혼식을 올린다.
둘 사이에 아들 루카가 태어났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고
결국 그들의 결혼 생활도 1979년 이혼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안드레아 도티와 이혼 후
오드리 헵번은 진정한 소울메이트인
로버트 월더스를 만나지만 결혼하지 않고 남은 생을 혼자 살았다.
그녀는 생전에 월더스와의 관계를
‘결혼이 그 어떤 것도 추가하지 못할 만큼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말했다.
로버트 월더스는 오드리 헵번을 만난 이후 그녀의 구호 활동을 도왔으며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곁을 지켰다.
그녀는 우연히 기금모음 행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 자신의 영화 경력이 세상 사람들에게 관심과
신기함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영화의 힘이란 정말 놀랍네.”
이후 그녀는 유니세프를 찾아갔다.
유니세프가 그녀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가 먼저 유니세프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햅번은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자신이 2차 대전 직후 유니세프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받았기 때문에 유니세프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를
증언할 수있습니다. 유니세프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마음은
평생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오드리 햅번 취임사中-
그녀는
유니 세프 평화대사역을 수행하기도하고,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돕는 자선 행사를 주최하기도 하였으며,
기아에 허덕이는 세계 오지의 어린이들 구호에 앞장서
88년 부터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이디오피아,수단,베트남을 방문했다.
그녀의 헌신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아카데이는
1993년 3월 29일 아카데이 시상식에서
"인도주의 상"
시상을 계획하였으나 오드리 햅번은 끝내 그 영광을 보지 못하고
대장암으로 인해 스위스 제나바호의 톨로체나즈 자택에서
63세의 일기로 사망하게 된다.
미국은 그녀에게
1999년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n)"을 수여했고
"미국 필름 협회(American Film Institute)"는
'미국 영화 100년사에서 가장 뛰어난 여배우 100인'을 선정하였는데 오드리 햅번을
3위에 올렸다.
오드리 햅번의 암 소식이 알려졌을 때 누군가가 물었다.
“당신은 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아이들을 돕는 거죠?”
오드리 헵번이 말했다.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희생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희생 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받은 선물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오드리 햅번은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때에 아들의 손을 잡고 시를 읊어준다.
그것이 오드리 햅번이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for attractive lips, speak words of kindness.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For lovely eyes, seek out the good in people.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For a slim figure, share your food with the hungry.
날씬한 몸대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라
For beautiful hair, let a child run his fingers through it once a day.
아름 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의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For poise, walk with the knowledge you'll never walk alone....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너 자신이 혼자 결코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해서 걸어라
People, even more than things, have to be restored, renewed, revived,
reclaimed and redeemed and redeemed....
사람들은 상처로 부터 복구되어져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 져야하고
병으로부 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 부터 교화 되어야 하며
고통으로 부터 구원 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Never throw out anybody.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Remember, if you ever need a helping hand, you'll find one at the end of your arm.
기억하라, 만약 내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As you grow older, you will discover that you have two hands.
당신이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One for helping yourself, the other for helping others.
한 손은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사람을 돋는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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